수도회 역사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도회 역사

1967 • 10

어머니회 구성 계획 발표

1969 • 03

청원자 입회식과 어머니회 발족

1971 • 04

파티마 성모 소자매회로 개칭

1972 • 03

초대 수도원장 및 수련장 김의경 수녀 임명 파견

1974 • 02

파티마 성모회로 개칭

1978 • 10

프란치스코 제3회 수녀회로 재발족

1979 • 10

회원 5명 프란치스코 정규수도3회 회원으로 첫 서원

1980 • 11

수원교구인가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명칭 허가

2001 • 06

수도회 설립과 회헌의 장애 없음(NIHIL OBSTAT)의 허가 (성좌인류복음화성)

2002 • 03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교구설립 및 회헌 인준에 대한 수원 교구장 최덕기바오로 주교의 교령선포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불우 아동들을 돌보던 사랑의 사도직에서 태동했습니다.
성모님의 모성을 본받아 기도와 보속, 사랑의 실천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섬기고, 성교회의 성화와 세계 평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했습니다.

01 창설

1969년 3월 21일(예수 고난 주일)에 이우철 시몬 신부님에 의해 방인 수녀회가 창설되었습니다.

02 성심원의 시작

신부님은 수녀회가 창설되기 20여 년 전부터 예수 성심께 봉헌된 불우 아동들을 위한 소년들의 집 “성심원(1946년 6월)”을 운영하셨습니다.
당시 29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중림동 본당에서 보좌신부와 가명 초등학교 교장직을 맡으셨으며, 음악을 대단히 사랑하시는 사제셨습니다.
그 시기는 해방 직후라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고, 많은 소년들이 거리를 부랑하고 있었습니다.

03 부랑 소년들과의 만남

신부님은 본당 근처 서울역을 오가며 부랑 소년들을 만나셨고, 연민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좁은 사제관에 5명의 소년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하여 이들과 나눔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04 시설 확장과 전쟁의 시련

하느님의 섭리는 사랑의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고, 무의무탁한 어린 소년들이 보내졌습니다. 좁은 사제관이 더욱 비좁아지고 봉사자들이 필요해졌습니다. 신부님은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도직으로 받아들이셨고, 1년 뒤 소년들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6·25 전쟁이 발발하여 큰 시련을 겪었지만, 신부님의 자부적인 사랑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05 어머니회의 조직

매년 200명이 넘는 소년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양육·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동들에게는 자모적인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성심원 창립 당시부터 뜻을 함께했던 김의경 막달레나와 몇몇 자매들이 청원하여 “어머니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단체가 모체가 되어 성모님의 모성을 본받아 불우 아동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창설되었습니다.

06 창설자의 정신

성모님께 대한 깊은 사랑은 창설자의 생애 전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원들에게 늘 “불우한 소년들의 어머니가 되십시오”,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수도자가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의 모성이 본회의 모든 사도직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는 창설자의 정신으로 드러났습니다.

07 발전과 오늘

1979년, 5명의 수녀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살아갈 것을 서원했습니다. 1980년 3월, 본원은 서울대교구에서 수원교구로 옮겨졌고,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의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수녀회는 복되신 어머니이자 중재자이신 성모님과 함께, 성교회의 성화와 세계 평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히며, 또한 보속의 생활로 주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고자 합니다.

1968년 성탄선물

성심원아들과 함께 하는 성 금요일 수난 감실 성체 조배